안디와 미겔

쿠바 여행기 2

아바나에서 셋째 날, 남편에게 “오늘은 어딜 갈까?” 물었더니 대학교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쿠바를 대표하는 아바나 대학까지는 걸어서 50분 남짓이었다. 꽤 멀었지만, 갈 때는 걷고 대신 올 때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우리는 현지인들이 사는 마을을 구경하며 천천히 아바나 대학까지 걸었다.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아바나대학 정문

한참을 걸어 언덕과 계단을 올라 아바나 대학교에 도착했다.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캠퍼스 특유의 활기가 느껴졌다. 어디부터 가야 할까 안내도를 보고 있는 동안 두 남학생이 다가왔다. 자신들을 안디와 미겔이라고 소개한 두 사람은 영어를 꽤 잘했다. 으레 그렇듯이 어디서 왔냐는 질문으로 대화가 시작되었고,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그들은 매우 반가워하면서 자신들이 요즘 한국어 스터디를 하고 있다며 폴라로이드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사진 속에는 한국인처럼 보이는 동양인 여학생과 안디와 미겔 그리고 다른 학생 몇 명이 있었다. 안디와 미겔은 우리만 괜찮다면 학교를 구경시켜주고 싶다고 했다. 의심이 많은 나는 경계심이 들었다.

“오빠, 얘네 믿어도 될까? 뭔가 수상한데.”

“이런 게 진짜 여행이지! 현지인과 친해질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야!”

그렇게 우리는 그들의 제안을 수락했다. 안디와 미겔은 제일 먼저 아주 오래된 나무가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쿠바혁명 당시 *피델 까스뜨로가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라고 했다. 덩굴이 길게 내려온 나무는 게릴라 부대가 활용하기에 제격으로 보였다. 그 주변에 혁명 때 쓰인 탱크가 전시돼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에 궁금한 것이 많았던 우리는 안디와 미겔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쿠바는 진짜 대학교 학비가 무료인지 물었더니, 무료가 맞지만 대신 국가 소유 공장에서 의무 노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안디와 미겔은 1주일에 한 번씩 시가 공장에서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일하는 공장이 학교 근처에 있어 가 보았지만, 아쉽게도 문이 잠겨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게릴라 나무 앞에서 즐거운 한때

전시된 탱크 앞에서 안디, 미겔과 함께

다음으로 그들은 우리를 학교 앞 건물로 데려갔다. 까스뜨로가 오래 전 학생이었을 때 묵었던 하숙집인데, 지금은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파는 카페가 되어 있었다. 안디는 이곳에서 꼭 먹어야 할 술이 있다며 ‘네그롱’이라는 칵테일을 추천했다. 민트가 들어간 것이 모히또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투명하지 않고 연한 갈색이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칵테일은 투명한 럼과 짙은 갈색 럼을 섞어 만든 것인데, 하얗건 검건 피부색에 상관없이 민중의 통합을 위해 만들어진 술이라고 했다. 카페 벽면에는 이와 관련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술 덕분인지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살사 음악이 나올 땐 미겔이 살사를 가르쳐 주었고, 사적인 대화도 나누게 되었다. 내가 안디라는 이름이 특이하다고 했더니, 영어 이름 Andy를 스페인어식으로 발음하는 것이라고 알려줬다. 미겔은 학생이지만 벌써 결혼했고 얼마전에 아들도 태어났다고 했다. 남편은 쿠바 남자들도 군대에 가느냐고 물었다. 안디와 미겔에 따르면, 쿠바에서도 17세 이상 남자들은 2년 동안 군대에 가야 하는데, 그들도 징병제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또 쿠바의 가난한 현실 때문에 정부에 대한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어디든 세상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쿠바인들은 엄마 뱃속에서 부터 살사를 춘다고 한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함께 저녁을 먹어야 하나 다음 일정을 고민하는데 안디가 기념품 살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쿠바는 시가와 럼이 아주 유명하다면서 질 좋은 럼과 시가를 자기 학생증으로 50%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다고 했다. 생각지 못한 제안에 우리가 “관심 없는 건 아닌데…” 우물쭈물하는 사이 안디가 어디선가 시가와 럼을 사 왔고 가격은 200불이라고 했다. 그날 하루 예산에 맞춰 돈을 가지고 나온 우리는 난감했다. “지금 돈이 없는데 같이 택시 타고 숙소에 가서 줘도 될까.” 남편이 얘기하는 사이 나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디, 미안하지만 우린 지금 그만큼 돈이 없어.”

“방금 숙소에 돈이 있다고 했잖아. 이미 사 왔는데 어떡해?”

“너무 비싼 것 같아. 그냥 환불해. 오빠! 내가 얘네 이상하다고 했지!”

50원이면 버스를 타고 100원이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쿠바에서 매일 정해진 예산만큼만 돈을 쓰며 움직이는 장기여행자에게 200불은 큰돈이었다. 그들이 사 온 시가와 럼이 정말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지 확신도 없었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불편한 기류 속에서 그들은 그들끼리 스페인어로, 우리는 우리끼리 한국어로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말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어색하게 헤어졌다.

쿠바인 친구를 사귄 것 같은 기쁨도 잠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몹시 씁쓸했다. 그나마 네그롱 4잔 값은 우리가 내는 바람에 택시는커녕 집까지 50분 거리를 다시 터덜터덜 걸어왔다. 마음은 상처입고 몸은 피곤하고, 처음에 내 말을 듣지 않은 남편이 미워서 입을 꾹 다물고 앞서 걸었다. 남편은 말없이 뒤따라 왔다.

“걔네가 진짜 우리를 속이려고 한 걸까. 사실 정말 비싼 시가일 수도 있잖아.”

아직도 상황 파악 못 하는 순진한 남편이었다. 매몰차게 거절하고 돌아왔지만 사실 나도 확신이 없었다. 우리가 너무 돈 앞에 인색했던 건 아닐까?

집에 돌아와 저녁식사를 할 때까지도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쓰린 마음 가운데서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됐다. 3주 동안 아바나 서쪽 관광지 비냘레스, 쿠바 남부의 큰 도시 시엔푸에고스, 휴양지로 유명한 바라데로까지 돌아본 뒤 다시 아바나로 돌아왔고 어느새 쿠바를 떠나기 전날이 되었다. 호스텔에서 ‘빨간책’이라고 불리는 여행 정보 공유 노트를 뒤적이다가 그제서야 이런 글을 읽었다.

“아바나 대학 근처에 가면 시가와 럼을 팔려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양인이랑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보여주며 다가옵니다. 절대 낚이지 마세요!”

비냘레스 전망대에서

혁명가 시엔푸에고스 옆에서. 시엔푸에고스라는 도시 이름은 그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바라데로 캐리비안해에서

*체 게바라와 쿠바혁명을 주도했고 공산주의 이념 아래 49년간 쿠바를 통치했다. 쿠바 국민들에게 혁명 영웅 또는 경제를 어렵게 한 독재자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2016년 11월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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