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레스 그리고 티칼

과테말라

우리는 게으른 여행자였다. 계획을 세워 여행하기보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움직였다. 6개월 동안 라틴 아메리카를 돌고, 여름이 되면 북미로 이동하고, 그 후 남은 3개월은 유럽을 여행하자는 큰 밑그림만 있을 뿐이었다. 장기여행에 계획이 무슨 소용이겠냐는 우리와 달리 치밀하게 검색하며 다음 여행지를 계획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장기 여행자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그만큼 놓치고 있는 것 아닐까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어차피 여행은 아무리 많은 곳에 가도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보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계획의 완수보단 여행의 우연성이 더 좋았다. 우연은 항상 우리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했다. 멋진 장소를 미처 모르고 지나친 뒤에 아쉬워 할 때마다 남편은 말했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뭐!”

과테말라에 가는 것도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쿠바 이후 다음 목적지를 고민하다가, 우리보다 1주일 먼저 쿠바를 떠난 대만 친구를 무작정 따라가기로 했다. 본명은 유 아파(Yu Apa)이고 자기를 파라고 부르라고 한 이 친구는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과테말라 셀라(Xela)에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셀라인 이유는 수업료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파는 셀라로 오기 전에 플로레스(Flores)에 들러 마야 유적지를 돌아보는 티칼(Tikal) 선라이즈(Sunrise) 투어를 꼭 하라고 추천했다. 쿠바 바라데로(Varadero)에서 마지막인 양, ‘찐한’ 포옹을 하고 헤어진 것이 무색하게 우리는 착실히 그의 뒤를 쫓아갔다.

과테말라로 떠나는 날, 우리는 멕시코 국경을 넘어 벨리즈를 거쳐 과테말라에 도착하는 야간버스를 탔다. 새벽녘에 버스가 국경을 넘는 순간, 신기하면서도 묘하게 긴장됐다. 삼면이 바다지만 섬과 다름없는 나라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우리에게는 벅찼던 그 순간에, “언젠가 꼭 내 차로 한국과 중국 국경을 넘어 유럽까지 가고 싶다”고 남편이 말했다.

잠시 버스에서 내려 출국 절차를 밟을 때, 멕시코 세관은 출국세로 25달러를 내라고 했다. 정당한 세금이 아니고 여행자를 속여 챙기는 뒷돈이라는 걸 미리 알았던 우리는 돈을 안 내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 다른 방으로 격리되었다. 그 방에는 우리 같은 사람이 몇 있었고, 세관은 아무것도 모르는 여행자들의 돈을 다 걷은 뒤에야 우리를 불러 화난 듯이 여권에 도장을 쾅 찍고 통과 시켜줬다. 이 일만 빼면 비교적 수월하게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마침내 15시간 만에 과테말라 북동부에 있는 플로레스에 도착했다.

출국 절차를 기다리는 중

페텐잇사(Petén Itzá) 호수

플로레스는 과테말라 페텐(Petén) 주에 있는 작은 도시이면서, 이 도시에 인접한 페텐잇사(Petén Itzá) 호수 가운데 작은 섬의 이름이었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이 섬에 머물렀는데, 우리도 몇 군데 호스텔을 둘러보고 섬 아래쪽에 숙소를 잡았다. 플로레스는 스페인어로 꽃이라는 뜻이다. 지형이 마치 꽃 같았던 플로레스는 이름처럼 아름다웠다. 넓은 호수 끝 수평선 너머로 아침에는 일출을, 해 질 녘에는 일몰을 볼 수 있었다. 섬을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에는 2~3시간 정도 걸렸고, 자전거를 빌려 돌아볼 수도 있었다. 현지 아이들이 호숫가에서 수영을 즐기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조용하고 한적한 섬이었다.

플로레스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에 우리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다. 창 밖의 호수 끝으로 동이 터 오르면서 나는 스르르 눈이 떠졌다. 사실 전날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잠들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펼쳐진 주황빛 호수와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잠이 확 달아났다. 나는 서둘러 남편을 깨웠다.

“오빠, 얼른 일어나봐!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눈을 뜬 남편도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는 홀린 듯 발코니로 나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해가 떠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아침잠이 많아 일출을 볼 생각도 안 하던 내가 이 아름다운 섬에서 우연히 일출을 맞이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내일 티칼 투어도 피라미드에 올라 아침해를 보는 것인데, 정글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얼마나 경이로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파가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나 이른 아침에 있어!”

호수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

호수가 범람하여 인도가 잠긴 모습

티칼 투어는 새벽 3시 출발이었다. 이동 시간이 꽤 걸리기도 했지만, 선라이즈 투어이기 때문에 일찍 출발해야 했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나 투어사 봉고차를 타고 유적지 입구에 도착해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깜깜해서 주변에 뭐가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우리만 빼고 다들 후레쉬를 준비해왔다. 핸드폰 후레쉬를 켜 보았으나 여의치 않아 우리는 앞사람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누군가 옆으로 비춘 후레쉬 빛에 거대한 피라미드 일부가 보였다. 왠지 그곳에서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을 것만 같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행군 아닌 행군 뒤에 우리 팀 가이드를 만나 티칼 유적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피라미드에 올랐다. 유서 깊은 유적지인데 그 위에 사람이 올라간다는 게 조금 꺼려졌지만, 어쨌든 우리는 해 뜰 무렵, 마야인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피라미드에 올라앉았다. 이윽고 서서히 어둠이 가시기 시작했지만, 고생한 보람도 없이 일출을 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해는커녕 비가 안 오면 다행인 것처럼 보였다.

안개 낀 정글 사이로 피라미드가 보인다

피라미드에 앉아있는 지친 나의 모습

수 십 분이 지났지만 해는 떠오를 기미가 없었다. 안개 가득한 정글 사이로 솟아오른 다른 피라미드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이른 아침에 산속에 있어서인지 춥고, 잠은 못 자 졸리고 급기야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때, 눈이 번쩍 뜨이며 날이 밝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왔다. 해가 뜨지 않았어도 ‘이제 아침이구나’ 느낀 그 순간, 정글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구름에 가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태양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새 소리, 원숭이 소리 그리고 이름 모를 온갖 동물의 소리가 무성한 정글 사이로 여기저기 울려 퍼졌다. 그 중엔 재규어의 울음소리도 있었다. 우렁차게 포효하는 맹수의 소리를 날 것으로 듣기는 난생처음이었다. 동물원에서도 들은 적 없고, 나에게는 어느 영화사의 영화가 시작할 때나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참 신기했다. 동이 터 오르면 세상 모든 동물은 자신만의 언어로 태양을 향해 인사한다. 그 태양이 실제 눈앞에 있지 않아도 하루가 시작했음을 느끼며 그들만의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예외다. 밤, 낮 구분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 살며 자연과 멀어진 인간만이 그 의식을 잊었다.

전날 미리 선물 받은 일출때문인지, 비록 정글 속 피라미드 사이로 눈부신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정글 한복판에서 재규어에게 잡아 먹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생생한 야생성을 느낀 것만으로도 이 투어는 내게 충분한 값어치를 했다. 살아있는 자연과 나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새삼 느낀 신기한 경험이었다.

티칼은 2세기 무렵 건립된 마야 문명의 유적지로, 가운데 큰 계단이 있는 피라미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고 한다. 전성기에 수 만 명이 이곳에 부락을 이루고 살았으나, 8세기 무렵 멸망하였고 그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힘내!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티칼 유적지의 모습을 보려면 아래 링크로 이동해보세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티칼 국립공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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