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

2019년 여름, 구름과 바람의 아들 민재가 우리 집에 왔다. 가을에 중국으로 대학을 가는 민재는 입학 전까지 두 달 남짓 한국에서 지낼 계획이었다. 서울에는 연고가 없기도 하고 우리 집엔 남는 방이 있어 나는 민재를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내 인생의 아주 큰 전환기였던 작년, 발리에 머무는 동안 나는 구름과 바람이 운영하는 A2 빌라에서 지냈다. 10여 년 전 한국을 떠나 발리 우붓에 정착한 이 가족을 만나 교류하면서 나는 좋은 에너지를 받았고 당시의 일들이 잊지 못 할 추억으로 남았다. 그때 만난 민재와 동생 민주는 보석 같은 아이들이었다. 밝고, 자신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마음은 활짝 열려 있었다. 입시 스트레스 가득한 한국의 십대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보고 있으면 참 잘 자랐다는 생각에 내가 다 흐뭇해졌다. 두세 달 발리에 있는 동안 나는 아이들과 꽤 친해졌다. 그런 민재가 한국에 온다니! 함께 관광지를 가고 맛있는 것을 먹고 재밌게 놀 일들이 설레고 기대됐다.

민재가 오고서 얼마간 우리는 모두 즐거웠다.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북한 땅을 보고, 야구를 보러 고척 스카이돔에 가고, 생일을 함께 축하하고,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특별한 일을 만들어 여가를 함께 했다. 하지만 곧 특별한 즐거움이 불편함을 가려주지 못하는 순간이 왔다. 가족 아닌 사람과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한 사람이 늘었을 뿐인데 민재가 오고서 공간의 에너지가 확 바뀌었다. 민재가 조용히 방에 있는데도 누군가 이 집에 있다는 사실에 불편함이 느껴졌다. 한여름에 집에서도 옷을 챙겨 입고, 밥을 할 때 한 사람의 식성을 더 고려하고, 새로운 구성원의 생활습관을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불편하고 에너지 소모가 컸다.

그리고 나는 왜 민재가 모든 집안일을 어른스럽게 잘할 것으로 생각했을까? 민재가 보통 아이들보다 생각이 깊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엄마가 많은 것을 챙겨주던 10대 청소년인데 말이다. 민재가 중학교 때부터 혼자 여행을 다녔고, 구름과 바람의 의식주에 대한 교육 철학이 남달랐기 때문에 아마도 내 기대가 컸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민재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식사는 알아서 챙겨 먹겠거니 했던 내 생각과 달리, 밥은 챙겨줄 거로 생각하고 왔다는 민재의 말에 나는 하숙집 아줌마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민재가 오고서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선택할 수 있었다. 이대로 투덜거리며 불편을 인내하거나, 우리 모두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두 달이 긴 시간이 아니라, 선물처럼 주어진 짧은 두 달로 여기기로 했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불편함 속에서도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기특하게도 민재 역시 부산 할머니 댁에 내려가 편히 지내는 것보다 우리 집에 머물며 ‘실생활’을 배워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렇게 민재에게 역할을 줬다. 다 같이 식사 한 뒤에 설거지하기, 1주일에 한 번씩 집 청소하기, 금요일 저녁은 우리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기. 그리고 방의 불을 켜놓고 다니는 ‘자유분방한’ 생활습관은 이 집에 사는 동안 우리의 룰을 따르기. 정리나 집안일은 매우 귀찮지만, 습관을 들이면 어렵지 않을뿐더러 나중에 한꺼번에 치우는 게 더 힘들다는 생활의 지혜를, 영리한 민재는 곧 수긍하고 잘 따라줬다.

그렇게 민재와 함께한 두 달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먼저 자기만의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느꼈다. 남편과 나의 세계여행 시절에 우리에게 선뜻 자신의 공간을 내어준 친구들에게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가족 아닌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도 배웠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 깨달음은 이미 겪은 바 있다. 남으로 만나 결혼하고 가족이 되면서 사소한 생활습관으로 부딪치며 우리는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가. 갈등과 배려를 거쳐 우리는 서로를 감수하고 살아주는 고마운 존재, 가족이 된다. 또 한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우리의 과거를 반추하고, 아이가 있을지 모를 미래를 상상하며 민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우리 모두 한 뼘씩 성장했다고 믿는다. 다 민재가 와 준 덕분이다.

함께 하며 더 깊이 알게 된 민재는 참 반짝이는 면이 많은 아이다. 이제 부모 곁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민재를 보내며 나 또한 엄마 같은 마음으로 민재의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어디서건 자유롭고 행복한 주체적인 어른으로 성장하길, 어려움을 맞닥뜨려도 현명하게 극복하는 사람이 되길,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에 감사하고 베풀 줄 아는, 이 세상의 빛이 되는 청년으로 자라나길. 함께한 시간만큼 찡할 수밖에 없는 이별의 순간에 나는 그렇게 (우리 엄마 말에 따르면)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여름 손님’을 보냈다.

종로, 전봉준 동상 앞에서 민재

이 글이 재밌었다면 아래 광고를 꾹 눌러 주는 센스 ;)